마우리치오 카텔란 작품세계
리움 미술관 -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 작품
불안, 권위, 억압, 종교, 사랑 등의 감정과 개념에 대해 희극과 비극, 냉소와 농담의 경계에서 자연스러운 줄타기를 하면서 역설적 유머로 기성 체제를 풍자하고 신선한 시각으로 전개한 그의 작품을 보면 전반적으로 작가의 시선과 의도가 재밌기도 하지만 도발적이고 극사실주의적인 작품표현방식이 끔찍하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습니다.
특히 동물이 나오는 작품들은 처음에 잘 몰랐을 때는 정말 실물처럼 정교하게 잘 만들었구나 하고 작가의 제작기술에 감탄하면서 봤는데 전부 박제시킨 실제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다시 보니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불쌍해 보이고 몰랐던 처음 그때처럼 단지 미술작품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어졌습니다.
그래도 동물박제는 자연사한 동물만을 구입하여 미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거라고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제일 충격적이고 인상 깊었던 작품.
작품 속의 다람쥐는 식탁아래에 떨어져 있는 권총으로 미뤄보아 자살한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다소곳하고 얌전하게 죽어있어서 SNS용 설정 같기도 하고 오늘도 힘겨움에 죽음을 시도하다가 실패 후 잠든 소시민 같기도 합니다.
진짜 잘 만든 다람쥐라고 생각했는데 박제라니....
축 늘어진 자세로 약간 사선의 허공을 향해 덩그러니 떠져 있는 눈을 보고 있노라니 슬픔이 밀려옵니다.
미국에서 열린 아트바젤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바나나 1개를 회색 덕테이프로 벽에 붙여놓았던 작품인데 특별한 것 하나 없이 바나나를 예술가의 지시에 따라 단순히 테이프로 벽에 붙인 이 작품이 1억 4천만 원에 낙찰되고 다른 행예술가가 퍼포먼스의 일종으로서 전시되어 있던 바나나를 떼서 먹어버리자 또 한 번 이슈화되었으며 <코미디언> 관련하여 각종 패러디작품과 인증사진과 행렬이 이어지면서 카텔란은 더욱 유명해집니다.
수많은 과일 중 바나나였던 이유는 카텔란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과일이면서 항상 모양이 같은 단일 품종 과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각자체가 예술이 된다고 하는 개념미술의 경우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지침이 존재하는데 이 작품 역시 바나나를 어떤 각도로 놓는지 회색 덕테이프를 어떤 방식으로 붙이는지 지침이 있으며 다만 바나나 교체주기에 대한 지침은 따로 없고 2~3일에 한번 갈변이 시작되면 바꾼다고 합니다.
작품을 보고 나면 단순하고 누구든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최초로 상상하고 실행한 작가의 창의성과 의도에 점수를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1억 4천만 원이나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무리 봐도 의문이네요.
웃음이 비극적 상황의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불편한 진실폭로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관람자에게 상기시킨다.
실제 코미디언은 배우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닌, 허구와 현실사이의 림보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코미디언(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개념미술과 농담사이에 있으며, 개념미술엔 감정이 없고 농담은 통상 큰 생각을 전달하지 않는다.
모두가 예술은 헛소리라고 생각하더라도 거기서 어떤 가치를 발견해 설명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예술을 성찰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때, 당신의 혼잣말을 정리할 수 있을 때 성공한다.
- 마우리치오 카텔란 -
그림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의 한 장면에서 차용해 온 작품.
쓸모없어지자 자신을 해하려던 주인을 떠난 네 마리의 동물이 뭉쳐서 인간에 맞서는 내용의 동화 속에 나오는 수탉대신 까마귀를 사용했고 그들은 모두 관객인 인간에게 저항하듯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이들은 넓은 전시장의 시작과 끝지점에 각각 배치되어 있는데 전시장 입구에서 뼈만 남은 작품을 먼저 접하고 이건 뭘까 하고 보다가 다른 작품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마지막 끝자락에서 생전의 네 동물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며 그제야 이들의 정체를 깨닫게 됩니다.
힘들었던 가정환경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받았던 카텔란의 어린 시절의 감정이 반영된 작품으로 어른들의 억압에 짓눌리다 못해 두 손이 연필로 고정된 채 영원히 저 자리에 묶여 있는 소년처럼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카텔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찰리'는 작가의 유년시절을 작품화할 때 붙이는 이름입니다.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했고 말을 듣지 않는 나를 엄마는 매일 때렸다.
그때의 기억이 없었다면 작업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을 되돌린다면 난 그냥 평범하고 유쾌한 어린 시절을 택하겠다.
예술작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어린아이가 겪어야 하는 슬픔과 상처는 그 자체로 너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 바자코리아 2009년 6월 카텔란의 인터뷰 중에서 -
미술관을 털러 온 도둑 같기도 하고 미술계의 이방인이자 침입자라는 카텔란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한 작품인데 리움 미술관의 설계도면과 실제 건축상태를 확인해서 안전하게 뚫을 수 있는 네 개의 구역을 발견한 후 작가와 최종 위치를 결정하여 실제로 미술관 바닥을 뚫고 설치했다고 합니다.
축 늘어진 채 천장에 매달린 말의 모습에서 전쟁으로 무너진 20세기의 이상과 몰락, 다가올 미래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았다고 합니다.
경주마로서 평생 사람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은 뒤에는 작품이라는 명목하에 허공에 영원히 묶여버린 박제된 말을 보고 있으면 너무 비극적인 삶인듯하여 안쓰럽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중립국이었지만 나치를 도운 전적이 있어 비난을 받기도 했던 스웨덴 미술관의 제안을 받아 만든 작품이라는데 뒤에서 보면 소년의 몸집이지만 앞에서 보면 아돌프 히틀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지만 먼 곳을 응시하는 표정에서는 반성의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히틀러에게 침략당했던 폴란드에서 발표되어 더욱 논란이 컸는데 "히틀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면 안 된다", "유대인 희생자를 모독하는 행위다"라는 논란에 1년만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리얼했던 레트리버와 병아리를 보며 따듯하고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게 다 박제라니...
다양한 감정이 섞여 옵니다.
주인과 강아지가 차가운 바닥에서 죽어있는 건지 함께 쉬고 있는 건지 모호한데 뭔가 애잔한 느낌이 듭니다.
플란다스의 개가 언뜻 생각이 나기도 하면서요.
카텔란은 죽은 듯 누워있는 주인을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어린 시절 주무시는 부모님께 다가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던 어린 시절 경험에 비추어 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존재의 유대감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경험하는 두려움과 희망을 전달합니다.
실제 사람사이즈와 동일하게 만든 밀랍왁스로 만든 조각작품인데 전시장 벽에 뒤집힌 상태로 세워졌으며 1999년 무고한 서아프리카 이주민을 경찰이 우발적으로 죽였으나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911 테러 이후 발표된 작품입니다.
나란히 뒤집힌 뉴욕경찰의 모습에서 무너진 쌍둥이 빌딩을 연상하고 나아가 테러로부터 국민을 지켜내지 못한 국가의 실패와 공권력의 무력함을 조롱하며 풍자하는 작품입니다.
미국의 상징인 성조기가 그려진 검은색 철판에 실제로 총을 쏴서 만든 작품으로 국가 안보를 이유로 벌이는 각종 전쟁, 총기사고와 규제논란, 인권탄압등에 대한 미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꼬집고 있습니다.
뉴욕의 시장에서 발견한 작품으로 만든 것으로 뉴욕 911 테러 희생자를 기리고 구조작업에 뛰어들었던 소방관에게 감사를 전하고 도시의 회복을 염원하는 메시지가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실제로 밀라노에서 카텔란의 작품거래를 담당하던 갤러리스트를 테이프로 벽에 붙여둔 뒤 방치한 후 찍은 사진인데 작가와 그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고 그 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갤러리스트가 주도권을 잃은 채 관객 앞에 전시된 것으로 갤러리스트의 이미지를 깨기 위한 퍼포먼스였다는 말도 있지만 의도가 뭐였든 해당 갤러리스트는 결국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합니다.
바나나를 벽에 붙이기 10년 전에 이미 사람을 먼저 붙여버렸네요.
커다란 화강암에 1874년 이후부터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이 패배한 모든 경기 스코어를 새겨놓은 작품으로 참전용사 기념비를 닮은 이 작품은 전쟁과는 다른 무게를 지닌 축구경기의 패배를 다루어 스포츠경기를 둘러싼 과열된 반응을 재고하는 의미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살짝 열린 냉장고를 무심코 들여다봤다가 사람이 들어있어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작품인데 저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유일한 안식처인 양 저렇게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짠합니다.
손과 발의 디테일이 매우 리얼합니다.
<어머니> 1999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을 때 고행수도자 파키르가 기도하는 손만 밖으로 드러낸 채 2시간 동안 땅에 묻혀있는 고행을 실시했고 개막행사기간 수차례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그때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진작품 제목은 어머니...
독실한 신자였던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언제나 한 가지 마음뿐인 어머니가 생각나게 합니다.
<아버지> 카텔란 본인의 발이라고 하는데 작품 한쪽 벽을 다 채운 거대한 사이즈로 실제로 보면 더 압도적으로 감정을 자극합니다.
상처 입고 더럽혀지고 거칠어진 발만 보아도 그간 삶의 고난의 무게가 느껴지는데 게다가 아버지라는 제목이라니....
이 사진 한 장으로 오래 먹먹했습니다.
붉은 레드카펫 위에 놓인 시신을 연상케 하는 아홉 개의 조각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고 진짜 사람을 천으로 덮어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질감과 형태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카델란 작가의 개인적인 이미지로 출발하지만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튀르키예 지진 등 각자가 생각하는 제각각의 비극을 떠올리며 각종 참사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공감하게 합니다.
운석에 깔린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모습을 실제 사이즈와 똑같이 실감 나게 만들어냈는데 특정 종교를 넘어 지역적 맥락에서 권위의 소멸, 종교의 죽음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운석에 깔린 와중에도 꼿꼿한 자세 그대로 십자가를 꽉 쥔 채 버티고 있는 모습에서 권위를 놓지 않겠다는 교황의 의지가 보입니다.
믿음에 대한 무례함이라며 종교계는 물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논란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이탈리아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을 통째로 모방하여 축소해서 만들었다고 하며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자세히 볼 수 있는데 아주 작은 공간이라서 줄 세워서 관람시키므로 각 회차별로 입장하면 이 작품을 제일 먼저 보는 게 좋습니다.
실제로 시스티나 성당은 사진촬영도 불가하고 종교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천장이 워낙 높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천장화를 육안으로 자세히 보기 힘들다는데 이 작품으로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공허감 또는 거대한 빈 공간이라는 의미(Void)의 작품이지만 카텔란의 대부분 작품을 약간씩 변형시켜 빼곡히 채워 넣은 작품으로 디테일을 너무 잘 살려 만들어서 구석구석 살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 작품 하나면 자세히 봐도 카텔란의 작품 대부분을 복습 또는 섭렵하는 셈이 될지도요.
* 관련 정보 링크
about 마우리치오 카텔란 (Maurizio Cattelan)